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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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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의 혈전 ===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width=48.25%><nopad> [[파일:attachment/stalingrad_1942.jpg|width=100%]] ||<width=52%><nopad> [[파일:Командный_пункт_62-й_армии_начальник_штаба_Н.И._Крылов,_В.И._Чуйков,_К.А._Гуров,_А.И._Родимцев._Декабрь_1942_г.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상징하는 바르말레이 분수(Barmaley fountain)[* 여러 매체에서 나오는 유명한 동상으로, 1950년대에 철거되어 사라졌다가 2013년 8월에 다시 만들어졌다. [[브이 포 벤데타]]와 [[시계태엽 오렌지]]에서도 나오고, 소련군의 유명한 [[저격수]]인 [[바실리 자이체프]]를 그린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초반부에 바실리가 총알 다섯 발로 독일군 다섯 명을 저격하는 장면에서 바실리가 숨어 저격한 분수도 바로 이곳이며, 이 장면을 오마주한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소련군 첫미션에서도 나온다. 게임 [[코만도스 시리즈|코만도스 3]]의 러시아 첫 임무에도 이 분수가 등장한다.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의 첫 번째 미션 이후에도 등장한다.] || 시가전의 주역인 62군 지휘부. 오른쪽부터 [[정치장교|{{{#fff 정치장교}}}]] 쿠즈마 구로프 중장,[* 1901-1943,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인 1943년 9월 심장마비로 사망. 어쨌든 구로프는 지휘권에 간섭하지 않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62군의 사기를 계속 유지시켜 정치장교로서 이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 62군 사령관과 참모장이 모두 원수로 승진했기 때문에, 전후까지 생존했으면 원수진급이 유력했을 듯.] [[바실리 추이코프|{{{#fff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 신경성 습진 때문에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참모장|{{{#fff 참모장}}}]] [[니콜라이 크릴로프|{{{#fff 니콜라이 크릴로프}}}]] [[준장|{{{#fff 소장}}}]]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T8AxuiNVS4Q, start=71)]}}}||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스탈린그라드(2013)|{{{#fff 스탈린그라드(2013)}}}]]에서 묘사된 전투 당시의 시가전 || 방어의 중핵인 62군과 64군을 중심으로 한[* 그외에도 21군, 28군, 38군, 57군, 63군, 1전차군, 4전차군 등 많은 부대가 참전했다.] 총 50만 이상의 병력이 집결한 상태였는데 이들은 외곽 방어선이 붕괴되자 시내에 집결하여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 위에서 소련군 제62군과 제64군은 무너진 집과 공장을 이용하여 방어 거점을 구축할 수 있었다. 전투는 치열하고 잔혹했다.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소련군 신병들은 [[하루살이|평균 생존 시간 24시간]]이란 끔찍한 기록을 남겨야만 했다. 1942년 7월 27일, 볼가강을 건너 퇴각하는 장병은 군사법원에서 소환될 것이라는 227호 명령을 발동했다.[* 이전 서술에서는 227호 명령으로 퇴각하는 병사들을 즉결처분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졌지만 227호 명령에서부터가 즉결처분이나 총살을 하라는 언급이 없다. 다만 이유없이 후퇴하는 등의 행동에 대해선 군사재판에서의 법적인 조치를 예고했을뿐이다. 물론 탈영 및 반역은 사형이다. 단순 탈영은 형벌부대선에서 끝내줬어도 추가 범죄가 있으면 즉시 사형을 받았다.] 이후 어떻게든 스탈린그라드 사수를 위해 수천 킬로미터 밖의 시베리아나 극동에서 지원군을 끌어오기도 했고, 해군 육전대도 대거 동원했다.[* 당연하지만 소련군도 마구잡이로 퇴각한다고 총으로 쏴죽이는 일은 하지 않았고 그런 비윤리적인 살인 남발로 병력이 부족하지 않았다. 물론 복무상의 게으름등의 이유로 전차병등 기피 병종으로 강제 배속 당하기도 했다.] 독일군 또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시가전]]에서는 자신들의 장기인 제병 협동[* 이 군사용어에 대해서 여러 번역들이 있는데 국군은 제병협동이라 칭한다. 연합은 나라 단위로 다른 경우(예: 한미연합)에 주로 쓰고 합동은 기관별로 다른 경우(예: 육해공 합동작전, 민관군 합동훈련)에 쓴다. 제병협동은 보통 같은 육군 소속 보병, 포병, 전차 등 여러 병과 부대의 전술행동에 대해 쓰는 말이기 때문에 협동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술 같은 유연한 [[기동전]]을 전혀 구사하지 못하고, 그저 소규모 [[보병]]들의 근접 전투를 치르는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맹폭을 퍼부어 시가지를 박살냈는데 이는 시가전에서 건물의 잔해들로 인해 차량의 진입을 막는 장애물과, 방어하는 소련군에게 많은 엄폐물을 제공하는 등 악수로 작용했다.] 그 결과 수많은 독일군 부대가 투입된 후 며칠 안에 전멸하기 일쑤였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nurse-bandaging-wounded-soldier.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부상당한 병사를 치료하는 소련 병사 || 어떤 희생이 있던지 도시는 사수되어야만 했고, 당시의 소련군은 여러 면에서 독일군보다 열세였다. 특히 소련군은 제병협동 면에서 독일군에 비해 심각할 정도로 미숙했기 때문에, 독일군에게 제병협동이 가능한 공간을 내주는 것은 목을 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추이코프는 그런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자신에게 남은 소련군 소부대들을 독일군 전선에 바짝 붙여서 배치했다. 게다가 소련군은 병력 개개인의 근접전 화력은 [[PPSh-41]] 덕분에 독일군보다 뛰어나서 중화기를 활용하기 어렵게 만들면 추이코프의 생각대로 숙련도는 떨어지더라도 독일군에게도 무시못할 손실을 안길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추이코프는 이렇게 소련군 부대를 독일군과 가까이 붙여놓아 독일군의 장점인 우세한 화력을 함부로 투사하지 못하게 하고[* 아군이 소련군과 가까이 있는 상태에서 함부로 공격했다가는 아군 오사의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건물마다 하나하나 병력을 배치해 강제로 [[백병전]]을 일으키는 시가전 전술을 제안하여 독일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효과를 보았다.[* 추이코프는 이러한 전술을 '적 껴안기(Hugging the enemy)'라고 불렀으며 독일군은 생쥐 전쟁(Rattenkrieg)이라고 불렀다. 부엌에서 쥐가 도망가면 또다시 거실에서 쥐잡기를 해야 하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attachment/asiansoviet.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한 아시아계 소련 육군 병사 || 소련은 병력을 확충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시베리아]]에서도 대대적인 징집[*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도 원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군 태평양 함대 행정 [[부사관]]으로 근무하다 흑해 함대, 그리고 [[해군육전대]]로 전속되는 서류상 절차를 거쳐 전선에 투입되었다.]을 행하였고, 그 덕에 소련군에는 아시아계 장병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공산당 정부가 공식적으로 모든 사람, 모든 민족은 평등하다며 인종차별에 반대했지만 인민 대중의 인식을 전부 바꾸진 못해서 백인 장병들이 황인 장병들을 보고 몽골 놈이라고 인종차별을 하거나 보직에 불이익을 주는 일이 있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external/histclo.com/stalin-boys01s.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노획한 [[Kar98k|{{{#fff Kar98k}}}]]과 [[MG34|{{{#fff MG34}}}]]들을 들고 있는 소년병들[* 성인 병사들도 총 한 자루가 고픈 상황에서 주력 소총과 경기관총을 쉽게 다루지 못할 어린이들이 웃으면서 매달고 있는 점을 봤을 때, 실제로 소년병들이 이렇게 무장하고 싸운 것이 아니라 그냥 꼬마들을 데리고 '''기념샷''' 찍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 동방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소련군 피해는 상당했으며, [[소년병]]들이 활동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대개는 독일군의 공격으로 가족을 잃은 전쟁 [[고아]]들이었으며, 고아원 등 아동을 맡을 시설들도 파괴되어 차라리 도망치듯 군대를 따라다니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많아 많은 고아들이 소년병으로 자원했다. 당시 소련의 병역법 상에서는 만 16세~만 28세의 남성 시민들에게 병역 의무가 있었음으로 그보다 나이가 적은 소년병들은 당연히 정상적인 입대가 허용되지 않았고 대부분 그저 자원해서 잡역을 도왔으며, 그마저도 못하는 대여섯 살 꼬맹이들은 정신이 피폐해진 군인들의 힐링을 책임지는 마스코트처럼 군인들을 따라다녔고, 상황에 따라서는 스스로 자기 몸을 지켜야 했다. 이렇게 전쟁으로 집을 잃어 갈 곳 없어 군대를 따라다닌 꼬마들은 '연대의 아들(сын полка)'이라고 불렸으며, 꼬마들을 키우듯이 데리고 다닌 소련군 부대에 대한 기록들이 몇몇 남아있다. 물론 소련군에서도 소년병들이 있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소련은 자체적으로 소년병을 대대적으로 운용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헌병이 붙잡아다가 그냥 집으로 가라고 내보냈으며, 독소전쟁 시기 활동했던 소년병들은 전황이 급박했던 일부 현지에서의 자원자로만 구성되었다. 스탈린그라드의 소년병들은 전투가 끝나고 소련의 전황과 인력 상황이 개선되고 난 뒤에 사라졌다. 일부 너무 어린 소년들은 조기 전역시켜 집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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